'옷소매 붉은 끝동'은 궁녀를 상징하는데, 궁녀는 옷소매 끝을 붉게 물들여 입기에
홍수(紅袖)라고도 합니다. 드라마는 자신의 삶을 중히 여기는 궁녀와
사랑보다 나라가 우선인 왕의 궁중 로맨스 사극으로,
의빈 성씨 덕임과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의 사랑 이야기 입니다.
1. 드라마 개요
- 제목 : 옷소매 붉은 끝동
- 장르 : 사극, 로맨스
- 출연 : 이준호, 이세영, 강훈, 이덕화, 박지영, 장희진 외
- 방송기간 : 2021.11.12~2022.1.1
- 방송 횟수 : 17부작
- 기획/제작사 : MBC/SLL, (주)위매드, 엔피오엔터테인먼트
- 원작 : 강미강 '옷소매 붉은 끝동'
- OTT : Wavve, coupang play
2. 줄거리
궁녀 성덕임은 어릴 적부터 궁에 들어와 궁녀 교육을 받으며 동궁의 지밀나인으로 성장합니다.
흣날 정조가 되는 이산은 덕임과 함께 왕위에 오르기까지 여러 일을 겪으며 서로 더 이끌리게 됩니다.
덕임은 궁에서 친구들과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목표였으나, 이산을 사랑하면서 갈등을 하기 시작합니다.
몇 번의 위기 끝에 덕임은 후궁이 되고, 아들을 출산하여 세자에 책봉됩니다.
세자가 홍역을 앓다 죽게 되면서 덕임도 같은 병세로 죽게됩니다.
왕의 많은 여인 중 한 명이기보다는 자신으로 살기 원했지만,
결국 사랑을 위해 이산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합니다.
다만, 왕으로의 위치 때문에 정조는 덕임에게
한 여자의 남자이기보다는 왕으로 엄격한 자세를 취하게 되고,
덕임의 마지막 순간 '다음생에는 알은 체도 말라'는 말을 들으며 떠나보냅니다.
마지막회에서 나타나는 장면으로 덕임은
아마 그 끝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라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.
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산과 함께하고자 한 덕임의 선택은 많은 여운을 남깁니다.
3. 관전포인트
3-1. 배우
정조 이산의 역에 가수 2PM출신인 이준호 배우와
아역부터 탄탄한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이세영 배우가 덕임을 연기하여
어디에도 없을 비주얼 커플로 많은 관심과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. (MBC연기대상 베스트 커플상)
또한 빠질 수 없는 감초역할로 덕임의 스승인 서상궁역의 배우 장혜진과
이산의 호위무사인 강태호역의 오대환 배우가 웃음을 선사합니다.
덕임의 궁생활의 활력소이자 삶의 의지가 된 궁녀4인방에는 이민지 배우, 아율리 배우, 이은샘 배우가
함께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.
3-2. 궁녀의 삶
옷소매 붉은 끝동은 실존 인물인 정조와 의빈 성씨의 이야기를 고증하여 나타납니다.
특히 덕임을 통해 보여지는 궁녀의 삶은 흥미롭습니다.
궁녀(宮女)는 왕족을 시종하거나 궁의 행정관리 및 실무를 담당하는 여성입니다.
조선시대에는 여관(女官), 여시(女侍), 시녀 (侍女), 궁첩(宮妾)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.
내명부와 세자궁 소속으로 정5품부터 종9품까지 품계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.
후궁(後宮)이 될 경우 정 1품 빈(嬪)부터 종 4품 숙원(淑媛)의 품계가 내려집니다.
궁녀는 신분, 조상 건강 등 까다로운 조건으로 선발하였으며,
견습 나인은 15년이나 궁중법도, 한글, 천자문, 대학, 소학 등을 교양을 익혀야 했습니다.
또한 궁에 들어오면 늙어 병들기 전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.
다만, 모시는 분이 승하할 경우 3년 상을 치른 후 집에 갈 수 있었으며
결혼이 불가하고 오직 왕을 상대로만 연애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.
4. 드라마 감상평
지금까지 본 사극 중 최고로 꼽을 만큼 사극의 절제함과 아련한 사랑이야기가
여운을 많이 남기는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.
특히 엔딩장면은 모든 시청자들이 각자 해석으로 원하는 엔딩으로 생각 할 수 있도록
열어두어 만족스럽습니다.
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불편하지 않는 범위의 드라마 장면을 만들어 냅니다.
정조가 1786년(정조 10)에 직접 후궁 의빈 성씨를 애도하면 쓴
묘지명 <어제의빈묘지명>의 내용을 보면 드라마의 장면이 떠오르게 됩니다.
빈은 나면서부터 밝고 총명하여 돌이 지나자 능히 이름을 구분할 줄 알았다. 용모가 깨끗하고 행동은 단정하고 상서롭고 온화했다. 열 살이 넘어서 궁중에 뽑혀 들어왔는데 모든 왕실 친척 여인들이 높은 집안 혈통인 줄 알았고 타고난 기품이 남달라 능히 겸손을 지니고 검약을 이행했다. 의리의 큰 부분을 밝게 분별하고 굳게 지키는 바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였다. 처음 승은을 내렸을 당시 내전(효의왕후)에게 아직 후사가 없다고 슬프게 울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사양하였고 죽어도 명을 따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. 나는 감동하여 다시 다가가지 않았다. 15년이 흘러 널리 후궁을 뽑고 나서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고사하였는데 사속(하인, 노비)을 책벌하자 스스로 명을 받들었다. 당석(잠자리) 한 달에 임신을 하여 임인년(1782년) 9월에 원량(왕세자)을 낳았다. 그 해에 소용으로 봉했고 금세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으니 아들이 왕세자가 되어서였다. 이에 더욱 스스로 삼가고 두려워하며 내전에게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정성껏 예를 갖췄다. 시침(밤에 웃전을 모시는 일) 할 때 말하기를 "이제 나라의 형세가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는 내전(효의왕후)이 있고 또 후궁(화빈 윤씨)이 있습니다."라고 하며 다시 당석하지 않으려 간절히 간하고 사양하며 피했다.